베르나르 베르베르, 『심판』
모임일: 2021.1.11
발제자: 류재원
# 삶과 죽음
가브리엘 (꿈꾸는 듯한 표정이 되어) 1922년에서 1957년까지⋯⋯. 삶이란 건 나란히 놓인 숫자 두 개로 요약되는 게 아닐까요. 입구와 출구. 그 사이를 우리가 채우는 거죠. 태어나서, 울고, 먹고, 싸고, 움직이고, 자고, 사랑을 나누고, 싸우고, 얘기하고, 듣고, 걷고, 앉고, 눕고, 그러다 ⋯⋯ 죽는 거예요. 각자 자신이 특별하고 유일무이하다고 믿지만 실은 누구나 정확히 똑같죠.
카롤린 그렇게 말하니까 별 매력이 없네요. 하지만 존재마다 고유한 서정성을 부여해주는 미세한 결의 차이는 존재하죠. 케이스별로 심사숙고해야 하는 이유예요.
J) 아버지의 추천으로 책을 읽게됨/ 하려는 말이 너무 직접적이고, 토론할 거리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책을 읽는 시간보다 생각할 시간이 더 길었다.
M) 오랜만에 책을 읽음. 잘 읽혀서 좋았음^^. 좋은 책은 잘 읽히는 책이라고 생각. 베르나르베르베르의 풀어가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음.
S) 책이 엄청 잘 읽혔고, 문장이 짧게 희곡식으로 되어있어서 좋았음. 베르나르베르베르 책을 처음 읽었는데 너무 재밌었고, ‘신과함께’ 구조랑 비슷한것 같아서 익숙해보였는데, 심판하는 내용이 주 내용이 아니었다는 것이 신기했고, 공감이 안되는 부분도 꽤 많았다.
Y) 초반에는 희곡이고 잘읽히는 책이어서 재밌게 읽었는데, 그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다가 끝난 느낌이라, 나에게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던지 의문이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책을 많이 읽지 않아서 몰랐었는데, ‘불교’에 대해 알고 있나,, 생각이 들었음. 선업이나 삶을 형으로 처하는 방식은 모두 불교에서 기인했다는 생각.
✔ 토론이나 토의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그냥 마음에 드는 구절이라 가져왔어요^~^ 하하. 모두 기억에 남는 구절이나 맘에 드는 부분이 어디였는지 이야기해보아요~
J)위에 적어 놓은부분이 인상깊은 부분이었음. 최근에 나온 책인데 왜 이 주제를 가지고 이런식으로 풀어썼는지 잘 이해가 되진 않음. 유머코드로 사용한건지,,
M) 공감되는 부분이 많음. 한 사람을 심판하는. 지상에서 심판인 아나톨이 가브리엘과 역할을 바꿔서 판사가 되고 가브리엘이 다시 삶으로 돌아감. 비슷하게 살아가지만 각기 다른 서정성. EX. 대학생 강의 듣고 과제하고. 하지만 각자 느끼는 것 다름. 미세하게 다른 결로 사람들이 인생이 바뀜.
P.45 베르트랑 중요한건 당신이에요 피숑씨~: 남들이 되던말던 결국 중요한 것은 나. 인생관이랑 비슷해서 꼽음
S) M이 공감이 된다고 했는데, 왜 이런제목으로 죄를 지었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음(아내를 이 사람으로 맞은것부터 죄이다 등) 가브리엘이 자신이 아이가 되겠다고 뛰어드는 부분도 이해가 안됐음. ‘하지만 존재마다 고유한 서정성을 부여해주는 미세한 결의 차이는 존재하죠.’ 공감됨.
P.210. 나한테는 육화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요. ~
가브리엘이 다시 아이로 돌아간다는게 이해가 안됐고, 다시 태어나는게 형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Y) 공통적으로 인간존재를 그대로 보다보니까, 인간의 관점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일깨워주는 부분들에 공감을 함.
56P.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적인 죽음을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인간은 죽음을 최대한 미루고 잘 죽으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고, 죽음은 당연하다는 것을 당연하게 얘기를 하는데, 죽음을 두려울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 하지만, 반대로 죽음을 두려워함으로 삶이 가치를 지닐수도 있다.
142P. 인간들은 자신의 행복을 일구기보다 불행을 줄이려고 애쓴다.
내가 그동안 행복을 추구하는 척을 했던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브리엘 그러니까 삶을 요리로 치자면 유전 25퍼센트, 카르마 25퍼센트, 자유의지 50퍼센트가 재료로 들어가는 거예요.
(중략)
카롤린 하지만 당신이 자유 의지를 최대한 활용하면 유전과 카르마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도 있어요.
가브리엘 말하자면 자유 의지 50퍼센트를 가지고 다른 요소들을 새롭게 분배할 수 있다는 거죠.
✔ 유전, 카르마, 자유의지가 삶에 영향을 주는 세 가지 요소라는 점과 각각의 비율에 동의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비율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지/어떤 요소가 추가적으로 반영되어야할지)
J) 어느정도는 동의함. 운명적인 것, 의지 등이 요인이라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어떤것이 운명적인것이고, 선택적인 것인지를 알 수가 없음.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함. 그런데 이것이 내 이전 삶에 의해서 그 사람을 만나게 되는것인지, 내 자유의지로 만나게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음. 각각의 비율의 분배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음.
M) 어느 정도 운명론 입장을 가지고 있는 듯. 내 생애 큰 사건은 운명으로 정해졌고, 작은 사건들은 자유의지로. EX. 하나고, 이대 입학 등 커다란 사건 - 운명. 컴공과나 하나고 등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실제로 일어나면서 운명이라 생각. 그런데 사람을 만나는 과정을 통해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함. 운명으로 정해진 사건이 다른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아님.
S) 자유의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봄. 아무리 힘든 상황이어도 자신의 의지로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다는 식으로 자유의지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오히려 나는 자유의지의 비율이 적다고 생각함.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 가가 오히려 자유의지에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 ‘마시멜로우 실험’ - 알려진 사실과 더불어 아이들의 배경이 달랐음. 바로 먹은 아이들 - 상대적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서 이걸 놓치면 다신 못먹는다는 생각. 따라서 자유의지도 결국엔 자신이 어떤 운명을 타고나느냐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
Y) S와 정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음. 유전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다는 생각을 평소에도 많이 가지고 있었음. 카르마의 관점에서는, 전생의 사람이 내 삶을 결정하는데, 이런 전생 ,후생관을 믿지는 않음. → 카르마가 인생의 25%를 차지한다는 것은 공감할 수 없고, 오히려 환경이나 유전이 더 큰 비율을 차지한다고 생각. 환경, 유전이 50%, 자유의지가 50%라고 생각함.
✔ 아나톨이 카르마에 따르지 못한 삶을 살아간 것은 유전과 자유의지의 비율이 높은 삶을 살아갔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만약 아나톨이 유전의 영향 혹은 자유의지 50퍼센트를 가지고 카르마의 영향력을 줄여나간 것이라고 본다면, 카르마를 이루지 못한 아나톨을 벌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 심판
<아나톨 피숑의 죄>
- 자신에게 어울리는 상대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서로에게 권태를 느끼면서도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음(바람이라도 피웠어야 했다는 검사의 주장)
- 판사로서 망들리에 사건에서 말기 암 환자의 고통을 종식한 간호사에게 과도한 형을 선고했고, 약혼녀의 인육을 먹은 도쿠가와 다카시를 부당하게 풀어줌
- 음주운전, 불장난 등 시민으로서의 도덕성을 잃은 행동들을 저지름.
- 아이들을 방치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성장시킴.
- 자신의 재능, 직업적 소명을 외면하고 연극배우가 아닌 판사라는 직업을 택함.
✔ 베르트랑이 언급한 위의 아나톨이 죄목 중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이 있는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중대한 죄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얘기해보자.. 없으면 말고,,,, 사실 난 없어.....................................
J) ‘직업적 소명 외면’과 ‘바람을 피우지 않음’. 이게 천국에서 환생할 이유가 되는 죄라면, 인간 중 이 죄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듯. 그러면 환생하는 벌을 안 받으려면 카르마를 따르는 게 유일한 길? 나중에 아나톨이 아데미안 교수를 처음으로 심판하게 되는데, 책의 내용에 비춰봤을 때 아나톨도 사심을 반영해서 심판할듯. 그래서 아나톨이 가브리엘의 자리를 차지한 엔딩을 그렇게 낙관적으로 해석하지 않음.
법조계 부패 시사? 판사 아나톨이 뇌물 먹고 내렸던 잘못된 판결..
M) 악법도 법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라라. 읽을 때 그런 식으로 이해함. 심판을 받는 공간이 천국이고, 지상과는 법이 다름. 지상의 사람인 우리는 당연히 천국의 법을 이해하기 어려울듯. 우리가 당연하다고 따르는 것들이 우리니까 당연한 거지, 다른 환경이나 시대에서는 다를 수 있음. 특히 법의 경우에는 그 나라만의 인식&상황을 반영해서 만들어진 거니까. 이상한 문제가 생기면 죄를 바꿀 게 아니라 법을 바꿔야 함. 그런 접근이 필요. 가브리엘과 피숑의 역할이 끝에 바뀌는데, 피숑이 말하는 ‘천국에 내가 가진 걸 보여주겠다는’ 게 천국의 법을 더 합리적으로 바꾸겠다는 거?
S) J가 말한 두가지가 내가 생각한 도덕적 기준과 너무 안맞았음. 베르트랑이 너무 편한 삶을 택했다고 아나톨한테 뭐라고 했는데, ‘순응’을 했다면서. 그런데 아나톨의 삶이 ‘순응’이라고 볼 수 있는가? 오히려 자신의 정해진 길과 반대로 가는 것이 ‘순응하지 않은것’이 아닌가. 자신이 벌린 일에 대해 오히려 책임을 지고 희생한 것이 아닌가. ‘희생’이 과연 도덕적으로 잘한 일인가? 아나톨이 환생의 가족을 고를때, 좋지 않은 환경의 가족을 가지도록 떠밀렸는데, ,
아나톨의 행동은 순응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오히려 거스른 것이 아닐까? 만약 그러면 본인의 가족이나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기 위해 어떻게 보면 희생을 한 건데, 이 책에서 희생을 안 좋게 보는 것 같다. 희생은 도덕적으로 옳은, 바람직한 일인가?
배우의길이 아닌 판사의 길을 택한 것, 지금의 아내와 결혼한 것 모두 결국엔 책임(희생이라고 볼 수도 있음) 이 아닐까 생각함.
Y) 천국에는 재심이라는 제도가 없댔는데, 피숑이 그것을 바꿈을 암시하며 책이 끝남. M의 얘기 일리 있는듯. 마지막에 어린 아이를 구하려고 지하철에 뛰어들면 천국에서 점수를 많이 받는다? 전쟁에서 총 맞아 죽으면 점수가 덜하다? → 그러면 또 희생을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과 모순되는데..
죄 부분 읽을 때는 “그냥 그쪽은 그렇구나”라는 느낌으로 넘어감. 근데 생각해보니 죄목을 든게 검사 베르트랑인데, 베르트랑은 결국 천국에서 검사 역할을 하는 거고 검사는 대부분 지상에서 삶을 가졌던 사람들에 형을 내리는 거니까 굳이 별 거 아닌 것도 최대한 깎아내렸을 수도.
카르마는 천국에서 정하는 거니, 천국 사람들은 카르마를 비중있게 생각할 수도 있음. 그래서 카르마 지키지 않은 이들을 비판했을 수도..
“옮긴이의 말 p219 → 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가브리엘 허술하게 그려짐... 법조계 부패 같은 프랑스 사회의 문제를 건드리고..”
<베르트랑의 주장>
베르트랑 피숑 씨, 당신은 배우자를 잘못 택했고, 직업을 잘못 택했고, 삶을 잘못 택했어요! 존재의 완벽한 시나리오를 포기했어요. 순응주의에 빠져서! 그저 남들과 똑같이 살려고만 했죠. 당신에게 특별한 운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아나톨 우리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것 아닌가요.
베르트랑 25퍼센트의 카르마가 있잖아요! 당신의 삶을 이상적이고 성공적으로 만들고자 했던 엘리자베트 루냐크의 시나리오 말이에요.
(중략)
베르트랑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시도조차 않는 것, 그걸 여기서는 아주 좋지 않게 보죠!
카롤린 내 의뢰인은 인간이에요. 천국에서야 모든 정보를 다 가지고 있으니 훈계가 쉽죠.
베르트랑 성경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대로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너는 단 하나의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너는 너의 재능을 어떻게 썼느냐?> 당신은 당신의 재능을 어떻게 썼죠?
<카롤린의 주장>
카롤린 저는 우선 피숑 씨가 일개 인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평범한 인간으로서 그가 한 선택들은 수백만의 다른 인간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가브리엘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죠?
카롤린 잘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선택들이란 뜻입니다. (한 손을 뻗어 무게 다는 시늉을 하더니 다른 손으로 평형을 맞춘다) 외도보다는 신의를, 거짓보다는 진실을 택했죠. 그리고 이 맥락의 연장선에서, 결과가 불확실한 예술 분야의 직업보다 진지한 직업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베르트랑 (빈정거리며) 용기보다 비겁함을,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편안함을 택한 거죠.
(중략)
카롤린 감히 말씀드립니다, 재판장님. 단 한 번도 잘못된 판결을 내리지 않은 자만이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다.
✔ 카롤린과 베르트랑의 주장 중 어느 쪽에 동의하는가? 가장 큰 죄목이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고 직업적 소명을 외면한 것이라는 베르트랑의 말에 동의하는가?
J) 읽는 동안은 카롤린에 공감함. 특히 직업적 소명을 외면한 것을 죄목으로 물은 점이 의외였음. 남을 다치게 했다거나 피해를 준 걸 보통 죄로 여기니까. ‘왜 작가가 이걸 가장 큰 죄목으로 선정했을까’를 고민하게 만드는 게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 ‘죽음의 수용소’에 나오는 ‘매 순간을 두번째 사는 것처럼 살아라’. 지난 삶의 실수를 지금 고치듯이, 매 순간 치열하게 살라는 뜻. 순응주의에서 비롯된 요즘의 ‘욜로’ 같은 문화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라는 메세지 전달하려 한듯. 치열한 고민 끝에 어쩔 수 없이 내린 선택이었다면 처벌받지 않았을 수도. 피숑의 죄는 단순히 카르마를 따르지 않고 판사가 된 게 아니라는 점, 진지하게 치열하게 삶의 의미를 고민하다가 내린 선택이 아니라는 점.
왜 환생을 벌로 설정했을까 싶었는데, 만약 내 삶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게 죄목이라면 딱 맞아떨어짐.
소명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찾이 못한 사람은 이 책에서 처벌받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
M) 작가 소개란을 보면 작가 자체가 법학 전공 이후 언론학교에서 다시 저널리즘을 공부함. 베르트랑이 자신의 삶과 소명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아서, 물 흐르듯이 따라가서 비난하는 부분이 작가가 자신의 커리어에 대해 가진 자부심이 은연 중에 드러나는 게 아닐까? 작가는 법학을 공부했지만 소설가의 재능을 살리려고 노력했으니까. 작가는 매 순간 치열하게 고민하며 본인의 장점을 살렸는데, 아나톨은 안 그랬으니까.
나도 인간이니까 카롤린의 입장에 당연히 더 동의를 하지만.. 책에서도 아나톨이 직업적 소명을 따랐을 경우 미칠 수 있었던 선한 영향력 중 많은 부분이 사라진 것이니까 그걸 죄라고 여기는 듯함. 기독교적 입장에서 선한 영향력을 중요시 여기는 부분과 연결되는 듯. 머리로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감정적으로 공감은 안됨. 왜? 난 인간이니까^^
이렇게 죄를 주려면 천국에서 표시를 해줘야 되지 않냐?
S) ‘신과함께’가 계속 떠올랐음. 이 영화에는 한국적인 정서가 굉장히 많이 반영되어서인지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는데, ‘신과함께’와 비슷한 맥락으로 진행되는 이 책에서는 왜 거부감을 느꼈을까? 신과함께에서는 처벌의 죄목이 남과 관련이 있었음. 그런데 이 책에서는 자신에게 치열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벌을 내림. 아마 이 부분때문에, 책의 메시지에 공감하지 못한듯함. 보통 본인 스스로에게 충실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죄라고 여기지는 않음. 보통은 남에게 착하게 대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생각.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것도 죄일 수도 있다 라고 생각. 22년을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교육을 받고 살아왔어서 굉장히 이 책에서 전하는 메시지가 혼란스러웠음.
아나톨이 어느정도 잘못한 점이 있다고 생각. 본인에게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도 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천국에서의 기준이 다를 순 있겠지만, 나에게 충실하지 않은 것이 과연 죄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
Y) 나 역시 처음에는 베르트랑의 의견에 전혀 공감이 안 됐지만, 이제는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어느정도 감. 그래서 카롤린의 입장에 더 동의함. 내가 직업적 소명을 따르지 않은 죄로 처벌받으면 너무 억울할듯. 우린 아직까지도 내가 잘하는 게 뭔지 고민하고 있으며, 불확실성 속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입장인데 이런 부분에서 처벌받을 여지가 있다면 너무나 억울할듯.
천국과 내통하려면 고양이 등 표시가 있긴 할 듯 그런데 그게 미세해서 인간은 잘 모르는 듯.
✔ ‘소확행’, ‘욜로’ 등의 키워드가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시기가 있다. <심판>에서 이야기하는 삶과는 대척점에 있는 가치관이라고 생각된다.
‘욜로’나 ‘소확행’을 위해서는 자신의 직업적 소명이나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있게 고민해보지 않아도 된다. 지금 이 순간 맛있는 걸 먹고, 좋은 것을 보고, 소박하게 재밌는 일을 하는 것이 행복이라면 이러한 행복은 직업적인 소명이나 삶의 의미에 대한 고뇌 없이도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편안하게 사는 삶, 내 소명을 찾기보다는 순간순간의 행복에 무게를 두는 삶이 궁극적이고 지속적인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일까?
J) 소확행이나 욜로가 중요한 키워드라는 생각은 듦. ‘내가 삶에서 무엇을 찾아내야 하는가’에 매몰되다 보면 그 소명이 욕망이나 욕심이 되고, 그러다보면 다른 심각한 문제 생김. 소명을 찾아가는 길에 소확행이나 욜로 같은 키워드도 중간중간 넣어줘야 함. 근데 인생에 시련이 찾아왔을 때 그런 키워드에만 갇혀있다면 극복해낼 수 없을 것. 내가 이 삶을 왜 살아야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본 사람, 본인의 소명을 아는 사람만이 비극이나 시련 앞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창출해낼 수 있음. 이런 키워드에만 갇히면 시련의 극복할 힘을 얻을 수 없을 것.
M) 고딩 때까지는 소확행과 욜로를 추구함. 근데 대학에 오니 여자로서 성공해야 한다는, 한계가 없음을 보여줘야 한다는 인식과 목표가 퍼져있음. 가치관이 바뀜. 원래는 맛있는 걸 먹고, 중간중간 하고 싶은 걸 즐기는 게, 심판과는 다른 삶이지만 이게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음. 꿈을 이루는 과정 자체가 행복일 수도 있지 않을까? 자신이 선택한 거면 결과와 상관없이 행복한 삶 아닐까. 심판 속에서 말하는 좋은 삶이 누군가에게는 좋은 삶일 수 있지. 하지만 극단적인 예시로 정신질환자에게는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잘하는 거라고 하잖아. 각자의 상황이나 목표에 따라 행복을 달라질 수 있음. 행복은 언제든 성취할 수 있는 것^^
S) 소확행과 욜로가 옛날부터 있던 개념은 아닌데 왜 나타났을까 생각해봤으면, 이전의 삶이 현대인들에게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나타난 것임. 이전세대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 삶의 행복을 참던 사람들이 다수였음. 그런데 이러한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아짐. (사회가 너무 살기 힘들어짐. 이런 키워드들은 모두 사회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 좁아진 취업문, 높아진 집값 등) 어른들이 카푸어족등을 비난하는데, 비난할 자격 없다고 생각. 이전의 사람들은 소명의식이나 행복을 찾는데 치열하지 않았고, 생명을 유지하는 삶을 사는것에 치중이 있었음. 이런식으로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며 삶만 영위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사회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욜로나 소확행을 가치관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아짐. 즉, 욜로와 소확행이 생겨난 것이 합당한 것이라는 것은 J와 S의 의견에 동의. 우리 주변 애들이 멀리보고, 참는 애들이 많은데, 나역시도 저 둘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지속적인 삶을 위해 지금의 욜로를 포기하는 삶을 선택할 것같음.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성향이기 때문에.
Y) M과 반대로, 고딩 때까지는 대학입시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쓰며 스스로에게는 신경을 잘 못 씀. 그러나 대학 와서 조금 여유로워지니 소확행과 욜로가 내 가치관에 배어들게 됨. 욜로와 소확행에 어떻게 접근하냐에 따라 의견이 달라지는 듯. 나한테 관심을 갖고, 현생에서 힘든 것들을 도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차원에서 이 키워드를 지지하는 것 같음. 여전히 내 인생의 가치관으로 삼고 있음. 그러나 J의 말처럼, 단기적인 차원에서 이 키워드들 속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된다면.. 내 인생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
결국은 <심판>은 ‘최선을 다해 당신의 삶을 살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소확행이나 욜로 등을 삶의 방향성으로 삼고 자신의 소명을 외면하는 것이 ‘최선을 다해 삶을 살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가는 것이란 무엇일까?
# 환생
✔ 다시 태어나는 것이 형벌이라는 설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환생의 벌을 받을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심판>에서와 같은 죄목을 적용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죄목을 택할 것인가?
✔ 자신이 가브리엘 혹은 아나톨이었다면 환생을 택했을 것인가? 결말에 대해 얘기해보자(결말이 맘에 드는지,, 결말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지,, 가브리엘은 왜 그런 선택을 했고 아나톨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지...)
J) 나 자신의 삶에 충실하지 않아 환생의 벌을 주는 것은 말이 된다고 생각함. 환생이 벌이라는 설정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죽음에 대한 양면적인 생각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듯. 나는 다시 태어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선택하지 않을듯.
엔딩에서 카르마에 따르는 게 어렵다는 뉘앙스를 보임. 아나톨도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M) 아나톨이 다음 생에 대한 자신이 없어서 남고자 한 건 아닐듯. 사건의 선후관계가 반대되는듯. 완전한 무지의 상태에서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해야 하고, 또다른 심판과 형벌의 위기 앞에 서게 되는 건 벌 아닌가?
읽을 수록 작가가 본인의 삶에 대해 은연 중에 자랑하는 것 같음. 소확행이나 욜로에 휩쓸리지 않고, 본인의 소명을 치열하게 고민하며 사는 삶이 제대로 된 삶이고, 난 해냈다^^ 이 느낌.
우리 모두 정말 안정적인 삶을 추구한다..
순간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도태’의 의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수도.
S) J의 선택이 놀라웠음. 환생이 형이라고 말한 것 놀라웠음. 환생이 좋은 기회. 나는 다시 태어날 듯. 인생을 환상적으로 보진 않는 입장이지만, 인생을 살지 못한다면 그것이 인생보다 나을까 하는 생각이 듦. 순간의 즐거움만 따라가는 사람들은 많이들 도태된다?
Y) 불교의 윤회 개념에서 봤을 때는 결국 삶의 고리를 끊는 게 최종 목표. 욜로랑 소확행을 여전히 추구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남은 생애 동안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보고 싶지만 그게 크게 쉽지는 않음.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게 다시 태어나면 참 힘든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최선을 다하며 치열하게 고민하라는 게 작가의 메세지가 아닐까?
전생이나 후생을 믿지 않음에도 가끔 환생을 원하는 모순적 입장에 서있는데, 이 또한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에서 유래한 게 아닐까 생각. 죽음 뒤에는 이런 고민을 전혀 못할 거고 미지의 공간에 있을 텐데, 그게 두려움. 그래서 차라리 안정적이고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공간에 머무르고 싶다는 마음에서 환생을 원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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