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일: 21.02.04
발제자: 정문정
M: 단편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음.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
S: 읽으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던 부분이 많았음. 모든 부분에 상상의 여지를 남겨놔서 어려웠던 듯. 142p.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 딸에게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는 의미뿐 아니라 자기자신을 변호하는 얘기로 생각되었음. 소설자체가 어려웠음. 전개방식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되서 어려웠음. 88p.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는 내용이 와야할 것 같았는데 왜 이러한 내용이 마지막 문장으로 온것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음.
Y: 대부분 결말이 반전이라고 생각되었음. 작가의 구성방식이 이런것인가 생각함. 상황설명을 친절하게 하지 않아서 이런 반전들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음. 처음에 읽을 때는 단편소설집인줄 몰랐음. ‘일본에 가 닿기를’에서 소설 내용이 왜 ‘일본’이라는 키워드와 연결되는지 잘 모르겠음. 29p. “머리의 안쪽과 바깥쪽 사이에 세워진 벽이 무너져야 했다. 진실함에는 그것이 요구되었다.” 진실함의 정의에 대한 굉장히 좋은 비유.
J: 모든 소설들이 몰입되서 읽혔지만 결론이 뭐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대부분이었음. 처음 몇개는 그냥 읽었더니 남는게 하나도 없었음. 그래서 적으면서 읽음. 가장 기억에 남았던 소설은 (제일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르겠던 소설) 안식처였음. 마지막 결말도 잘 모르겠었고, 어떤 의미를 가진지 잘모르겠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코리. 가장 반전있는 스토리었음. 가장 충격적이어서 기억에 남음.
197p “오래 살다보면 많은 문제들이 그냥 해결된다~’ 나이듦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 일본에 가 닿기를
그래타는 밴쿠버 도서관에서 근무하던 한 여자와 계속 연락을 주고 받았는데, 지금 그 여자는 결혼해서 토론토에 살고 있었다.
- 아문센
그들은 토론토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몇몇은 토론토로 신혼여행을 갔다온 사람들을 알았다.
- 자갈
그러던 어느날 그는 토론토 거리에서 한 친구와 마주쳤다.
디어라이프는 여러 단편들이 엮여진 산문집같지만 결국 그 사이에서 미세한, 굵직굵직한 개연성이 존재한다고 느꼈다. 인간의 삶들은 결국 모두 연결되어있을 수 밖에 없는것인가? 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인간 개인의 독립된 삶은 불가한 것인가? (원시인, 자연인)
M: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들 하니 이 질문 자체가 유의미한지 의문이 들기도 함. 이 사회에 속해있음이 필연적인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J: ‘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되는 게 가능한가’가 아니라 ‘나와 완전히 무관해보이는 사람의 삶이 나와 연결되어 있을 수 있는가’의 질문인듯. 다른 사람들에게 받는 자극의 정도가 고립을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 Y가 말했듯 ‘일본에 가 닿기를’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헷갈림. 우리에겐 일본이 이웃나라지만, 소설의 작가와 독자들에게는 내용 상의 시점을 고려했을 때 굉장한 거리감의 상징. 케이티는 계속 세상과 한발짝 떨어져있고 근본적인 외로움을 느끼는 인물. 그런 의미에서는 인간은 완전히 고립되어 살 수 없다고 생각함.
Y: 단편 사이에 지역적 연결성이 있으니 처음에 단편집인 줄 몰랐음. 인간의 삶에 대해 다룬다는 것은 단편들의 공통점. 아직 인간들의 삶의 연결성까지는 생각이 전개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음.
S: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 예상치 못하게 전개. 보수와 진보의 차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이 사랑을 갑자기(맥락 없이).. 당혹스러울 때 많았음. 내가 살면서 사랑이었던 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건가? ‘사랑’(애인)으로부터 고립된 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으로 다가옴. 사랑이 있다고 해서 안정적이지는 않았음.
수백마일을 달리는 동안 그녀는 깨어 있는 시간에는 오로지 케이티에게만 신경썼다. 그녀의 그런 관심은 전에 없던 것이었다. 피터가 출근하고 둘만 있을 때 그녀는 입히고 먹이고 말을 시키며 당연히 케이티를 돌보았다. 하지만 아이에게 쏟는 관심은 단속적이었고, 다정함은 종종 전략적이었다. 그레타는 다른 집안일도 해야했으니까.
그들은 자식이 없어서 어느때건 어떤 것에 관해서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장례식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닐은 카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브렌트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 그가 편지를 써서 - 내가 그 사실을 안 것은 훨씬 나중이었다. - 자신은 아버지 노릇을 할 생각이 없으니 애초에 물러나는 게 좋겠다고 알려왔다.
부모에게 요구되는 자식에 대한 사랑, 특히 모성애라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라 볼 수 있는가? 결국 이러한 감정 역시도 사회에서 만들어내고 무의식적으로 요구되고 있는 감정 아닌가?
S: 모성애에 대한 논의가 굉장히 다양함. 과학적인 신경학 쪽에서도 많이 연구가 되고 있음. 우리는 모두 아이를 안 낳아봤고,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에 답하기 애매함. 근데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서는 그렇지 않은 가정이 많음. 의무적인 감정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음. 근데 사회적인 영향을 받아서 그것이 바뀌고 그것이 더 중시되었던 것. 자연스럽게 공존하는것. 케이티가 없어졌을 때 되게 놀라고 딸 손을 놓지 않는 모습. 모성애는 자연스럽다고 생각. 자갈에서는 양육권을 잃고 싶지 않았했는데 담배를 주는 모습에서 모순된다고 생각. 다른 자기가 느끼는 개인적인 감정을 더 중시하고 모성애와 그것을 같이 두기 때문에 혼란스럽게 느낀것. 부모들이 느끼는 모성애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우리가 보기에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엄마가 개인으로 느끼는 설렘 등의 감정을 같은 선상에 놓고 바라봤기 때문에 그런것. 우리와는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개인의 감정과 모성애를 같은 선상에 놓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함.
내가 부모가 된다면 난 자연스럽게 모성애를 느낄 것 같음. 열달 간 아이를 품고 있어서.
J: 나는 아기를 너무 좋아하고, 내가 자라면서는 모성애를 당연한 감정으로 여겨옴. 우리 엄마는 노력 없이 처음부터 모성애가 흘러넘쳤기 때문에 원래 모두들 그런줄 알고 계셨음. 10달 동안 본인 몸의 일부였던 아기를 낳으면, 모성애를 느낀다는 건 디폴트 같음. 하지만 모성애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감정을 얼마나 크게 느끼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니까. 이건 본인의 성장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타고나는 성향일 수도 있고. ‘모성애가 사회에서 만들어내고 무의식적으로 요구되는 감정이 아닌가?’라는 질문은 ‘그래서는 안된다’라는 답을 내포하고 있는 뉘앙스.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헌신이 요구되어야 하면 안되겠지만, 사회에서 요구되어야 하는 감정은 맞다고 생각함. 극단으로 가면 아동 학대나 유기로 갈수도 있겠지. 아이를 낳고 기르는 건 책임을 요하는 일인데, 단순히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정도의 모성애에만 기대면 안될 것. 책임감과 모성애가 꼭 분리되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
M: 나는 자연스러운 사랑을 받고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부모가 된다면 나보다 더 사랑할 수 있을지 의문.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 평소 애를 안 낳는다고 할 때는 나는 그 아이를 진심으로 헌신해줄 자신이 없다는 의미도 담겨 있음. 모성애가 단순히 아이를 낳으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은 아니라고 생각함.
Y: J와 S와 생각이 굉장히 비슷. 모성애의 크기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얘기에 강하게 공감. 최근 ‘사랑과 전쟁’을 보며 내 상식선에서 벗어나는 일들이 엄청 자주 일어난다고 느낌. 모성애와 관련해서도 비슷한듯. 나는 사랑받는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음. 그리고 사람마다 본인이 생각하는 모성애의 정의가 다를 수도 있을 것. 모성애가 시대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달라질 수 있는 건데, 그런 면에서 모성애가 사회의 영향을 받는 건 맞다고 생각. 그러나 그렇게 형성된 모성애가 부자연스럽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질문 자체에 대한 의문이 생겼던 듯.
그렇기에 그녀가 케이티의 엄마로서 버려할 것은 또있었다.
죄. 그녀는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였었다. 결연하고 탐닉적인 관심을 아이가 아닌 다른 것에 기울였었다. 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인가?
M: 죄는 아니라고 생각. 하지만 자식을 낳았다면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함. 비단 사회에서 주어지는 의무가 아니라, 본인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책임. 자연스러운 감정이 들지 않는다는 게 죄는 아니라고 생각.
J: 죄라는 게 어감이 강하긴 하지만, 꼭 악한 마음을 먹어야만 죄를 짓게 되는 건 아님. 어쩌다 보니 죄를 짓게 될 수도 있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건 처벌 받을 일은 아니더라도 죄라고 생각함. 한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모에게 받는 사랑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함. 내가 내 아이에게 그 아이의 인생에 그 정도의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한 ‘사랑’을 주지 못했다는 건, 그 기회를 박탈했다는 건 큰 잘못. 아이를 낳은 때 본인 예상과 달리 사랑이 안 생길 수도 있음 like in 금쪽같은 내새끼의 넷째. 그게 악해서 그런 죄를 저지른 건 아니겠지만, 그 아이 입장에서 보면 큰 잘못이 맞음.
S: 죄라는 어감이 강한 것 같은데, 죄보다는 잘못정도로 치환하여 얘기해보자면, 감정이 들지 않는 것은 본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것인데 그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는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음. 그러나 관계를 맺기로 한 이상 자신에게 어느정도 책임이 있음. 자식에 대한 사랑이 없을 순 있겠지만, 그것을 자식이 느끼게 한다면 그것은 죄라고 생각. 비슷하게 부부나 연인의 관계에서, 설령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하여도, 그것을 상대방이 느끼게 한다면 그것은 잘못이 아닐까 생각함. 본인이 관계를 맺기로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관계에서는 관계를 그만두면 됨. 그러나 부모자식관계는 끊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부모자식관계에서는 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함. 본인이 자식을 가지기 전에 충분히 고민했어야함.
Y: 책임 부분에서 자신을 버리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는데, 본인은 아이를 좋아하긴 하지만 일정 나이대가 넘어가면 그닥 좋아한다고 말할 순 없음. 자식을 매분매초 사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함. 미운 네살 등이 대표적 예시가 아닐까 생각. 흔히 애증의 관계라고 얘기하듯, 자식을 항상 부모가 사랑할 수는 없지만, 아예 사랑하지 않는 것은 책임과 연결지어 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함.
그들은 여기에서 내가 어떻게 가르치는지, 혹은 내가 요양원에 오기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무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내게 버터를 건넸고, 셰퍼드파이에는 마멋 고기가 들어있느니 절대 먹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들이 모르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들, 그들이 모르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 뿐이었다.
그것이 당신이 그 길 사람들을 나는 방식이자 사람들이 당신을 아는 방식이었다. 당신이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네면 그들도 인사를 하며 날씨 이야기를 한다. 그들이 차를 몰고 가는데 당신이 걷고 있으면 당신을 태워줄 것이다. 하지만 대게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고 생계를 꾸리는 방법도 어느정도는 모두 같은 진짜 시골 같지는 않았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라는 말이 있다. 다른 환경, 처지에 있는 사람과 진정한 우정,사랑 등의 감정을 진실되게 나누는 것이 가능한가? 과연 자신의 감정과 상황,상태를 다른 환경, 처지의 사람과 꾸밈없이 공유할 수 있는가?
S: 진실된 관계에 대해 사람마다 다른 정의를 내릴 수 있음. 공유해야된다고 생각되는 감정의 범위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나 공감하는 범위가 본인의 사고방식이나 주변인들에 따라 많이 변동되기 때문에. 이해가 기반이 되어야 소통이 가능함. 따라서 이해가 먼저 수반되어야하기 때문에 비슷한 환경, 공유할 것이 많이 있는 환경에서 진실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 그러나 사람마다 진실된 관계나 진정한 소통을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그 역치를 어느정도로 정하는지에 따라 가능, 불가능은 달라질 것이라 생각.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엄청 소수이지 않을까 생각함. 희귀하기 때문에 그런것들이 더 기사화,소설화 등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
J: ‘다른 환경’이나 ‘다른 처지’가 상대적인 표현이라고 생각. ‘자존심’에서 언청이와 오나이다가 환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진실된 우정을 나눔. 처음에는 이 둘이 다르다고 생각햇지만, 갈수록 결국 상실을 겪었다는 점에서 비슷했던 것 같음. 본질적으로는 같은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스컹크와 관련된 구절이 언청이와 오나이다가 다른듯 보이지만 비슷하고, 비슷한듯 하지만 서로의 길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걸 표현하는 것 같음. 나와 무관해보이는 사람조차도 나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얘기했듯이.. 오히려 다른 환경이고 다른 처지이기 때문에 감정을 공유하거나 공통점을 발견했을 때 더 깊이 있는 관계를 맺고 더 큰 쾌감을 느낄 수도 있음.
M: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오며 과거 친구들과 환경이 달라지게 됨. 대학을 안 간 친구도 있고, 바로 회사에 취직하기도 하고.. 그런 사람들과 진실되고 깊은 관계를 맺는게, 나이가 들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듦.
Y: 개인적으로는 mbti i임. i인 사람들은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사람들. 이런 나의 성격에 빗대어서, 공통점이 많아야 사람과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 그래서 이런 제한이 크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좁다고 생각. 다른사람들의 경우에는 적은 공통점으로도 친구를 맺는 경우가 있음. 공통점이 없더라도 서로의 다른 점이 흥미로워서 관계를 맺을 수도 있음. 결국 사람마다 공통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 나의 경우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과 가깝게 생각할 가능성은 적음 그러나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것이라 생각.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이상적인 얘기인것 같기도.
물론 세상은 달라졌다. 심리상담가들이 언제든 대기하고 있다. 친절함과 이해심을 갖추고. 그들은 우리에게 이야기해줄 것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그 타격이 단지 상상 속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그 사람들의 잘못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로 타격을 받는 사람들 못지 않게 그들도 똑같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의지만 있다면 어떤 일도 좋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정신력,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가?
S: 처음 읽을 때는 아니다 라고 생각함. 그러나 J의 말을 들으면서 극복의 정의에 따라 그것의 여부는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함. Y의 말을 들으면서는 정신력이나 그런 것들이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
상황마다 달라질 수 있음. 가능하긴 하지만. 일반화하여서 누군가에게 조언하려고 들면 안됨. 가난한 집에서 자수성가한 케이스, 신체적 결함을 극복한 케이스 등을 많이 얘기하는데, 정신력이나 의지의 크기, 지속할 수 있는 지구력같은 것들도 결국 환경, 여러 요소들에 영향을 받았을 것. 가능한 것은 맞지만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어려움을 정신력,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고 일반화 내려서 모든 상황에 적용하려 들면 안됨.
Y: J말에 굉장히 공감. 불리한 상황에서 본인이 어떻게 느끼는지는 정신력,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서도 그 선택 조차도 환경에 의해 제한을 받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됨.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결정되는 것들이 되게 많은데, 가난한 집에서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선택할 수 없을 수도 있음. 과연 이것을 정신력,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가. 환경에 의해 완전히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극한의 환경에서는 제한이 존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
M: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함. 슬픈 이야기일 수 있지만, ‘무슨 일이든 잘 안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구절에 공감함. 본인이 아무리 원하는 게 있다 하더라도 정신력만으로는 해결이 어렵고, 재능과 환경도 뒷받침되어야 함. 뮤지컬 ‘아마데우스’를 보고 왔는데 모차르트와 살리데르에 대한 이야기. 살리데르는 모차르트라는 천재를 옆에서 보며, 본인에게 그의 재능은 없고 그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만이 있음에 고통스러워 함. 살리데르도 노력은 많이 하지만.. 모차르트의 벽을 극복하지는 못함. 본인은 평범한 사람들, 신들에게서 재능을 부여받지 못한 자들의 수호자라고 함. “평범의 수호신, 살리데르.”라는 마지막 대사가 감동적. 좀 안됐다 싶을 정도로 힘든 환경에 있거나 재능이 없는데도 한 길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정신력만으로는 극복 불가라고 생각.
J: 주어진 환경을 극복한다는 걸 ‘성공’으로 설정한다면, 당연히 M 말처럼 불가능. 목표를 이루는 것만 성공으로 두지 않고, 그 목표로 나아가는 환경에서 나만의 무언가를 찾거나 느끼고 그걸 ‘극복’으로 정의한다면 난 가능하다고 생각. 당연히 정신력만으로 할 수 없는 게 있지만, 그 때 본인이 어떤 선택을 내리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극복’의 여부를 결정짓는다고 생각.
재스퍼 이모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단어를 설명해보라고 했다. 모세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아니었나? 아브라함의 하느님도 믿지 않고? 분명 유대교가 맞겠지? 아닌가? 마호메트교도 아니고 맞나?
종교의 종류가 다양한 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결국 종교의 역할은 동일하지 않은가.
“대체로 사람들은 신에 대해 모두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가진 것 같아요 ”
그는 모든 것이 위선이었다고 말했다. 완전히 믿지도 않는 복음서와 십계명을 벙긋거렸다고. 사랑과 섹스에 대한 자신의 설교나 관습적이고 소극적이고 회피적이었던 조언 또한 죄다 엉터리였다고. 그는 이제 자유를 얻은 사람이었다. 그는 영혼의 삶과 더불어 육체의 삶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코리는 그가 신앙을 가졌음에도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 - 그들이 방금 마친 행위 -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아버지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신에게 쓸 시간은 없었다고 했다.
종교에 대한 ‘진실되고 완전한’ 믿음이란 가능한 것인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J: 사실 종교에 대해 잘 모름. 주변에 독실한 신자도 잘 없음. M이 말한 게 일반적인 케이스이며 주된 종교의 기능. 내가 느끼기에는 종교에 관해서는 개인차가 너무 큼. 다들 다른 사연과 목적이 있음. 근데 이기심이나 본인의 소원에서 시작했지만, 그러다가 진실한 믿음으로 다가가는 사람들도 있는듯. 종교라는 게 사람들을 홀리는 매력이 있나봄. 기적 같은 일들을 경험하고 그게 신 덕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음. 그런 이들에게는 종교가 다가가는 의미가 우리의 경우와 다를 것. 그래서 더욱 위험하기도 함. 종교가 아니라 무엇이든간에, 너무 깊게 빠지면 위험하니까.
M: 종교의 다양성은 신자가 처한 환경의 다양성에서 유래함. 사람마다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최적인 종교, 자신에게 가장 맞는 세계관을 따르게 됨. 어떻게 보면 인간의 이기심. 종교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결국 본인의 이기심에서 비롯. 결국 기도하고 염원하면 바라는 게 있는 것. 종교모임을 가보면 항상 뭘 바라면 안된다고 하지만, 모두들 바라는 게 있고 나는 그렇기에 종교가 유의미하다고 생각. 그리고 진실되고 완전한 믿음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함. 왜냐면 이 척박한 현실에서 무언가를 바라기에 의존할 대상이 필요해서 종교가 생긴 거니까!!!
Y: M은 사람의 이기심이 종교에 대한 믿음의 근원이라고 했음. 나도 J처럼 그게 종교를 믿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 근데 그렇게 뭘 원해서 신에게 기도하는 게 현대 한국식 버전의 기독교라는 이야기를 들음. 하나고 코람데오도 보면 M같은 사람 반, 엄청 독실한 신자 반. 진실한 믿음이 가능한 사람들도 있는 것 같긴함. 종교가 다양한 건 교리나 종교를 믿는 방식이 다양하고, 사람들이 본인에게 편한 걸 찾기 때문. 근데 과연 그걸 이기심이라는 단어로 연결지을 수 있을지는 의문.
S: 모성애에 대한 질문과 비슷하게, 우리 집단은 굉장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다양한 답변은 없을듯. 가능한것 같기는 함. 주변에 보면 많음. 그러나 어떻게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음. 코람데오에 처음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바라는 것이 있어서 참여하는 것이 이기적인 것 같아서, 진실되지 않은 믿음같아서였음. 나중에 참여했을 때도, 결국 바라는 것이 있어서 참석함. 깊이있는 얘기를 못하겠지만 궁금함. 어디서 비롯되는지. 주변을 보면 모태신앙이거나 목사님 자녀인 경우가 많음. 또는 자신이 불안한 감정상태에 있을 때 종교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은듯. 일상이나 습관화 되었을 수도. 간증을 경험한 경우도 있는 것 같음. 나는 안되지만, 궁금함 정말로. 종교의 종류가 다양한 이유는 신에 대한 믿음 하나로만 이뤄지는 행위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존재하는 행위임. 이 뿐만 아니라 여러 요소들이 존재함.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여러개의 종류로 존재한다고 생각.
심리상담가는 우리가 그것을 알 수는 없다고 말했었다. “카로도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몰랐을 수 있어요. 관심이 필요했을 수도 있고 물에 빠져 죽을 생각을 한 건 아니었을 거예요. 자기 기분이 얼마나 상했는지 관심을 가져달라고 그랬을 수도 있겠죠?”
장례식에는 처음 가보는 거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부모님이 속한 사회에서는 장례식을 삶의 축하 행사라고 말했지만, 부모님은 아이가 그런 경험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죽음은 삶을 허무하게 만드는 존재인가, 아니면 죽음이 존재하기에 우리의 삶이 존귀해지는 것인가.
M: 죽음이 없다면 지금처럼 열심히 살지 않을 것 같은데, 또 가끔은 어차피 죽을 거 왜 이렇게 열심히 사나 싶긴 함.
S: 우리 삶에 좋게 활용하려면 후자처럼 생각하는게 좋을 것 같긴하지만 전제조건은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 본인이 언젠가 끝이 올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획을 짜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맞이한다면, 꼭 그렇게 죽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한다하더라도 죽음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더 가치있게 되는것. 죽음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오는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겠지만, 쉽게 결론 내리지 못하겠음.
J: 내 진짜 생각을 알기가 어려운 질문 같음. 죽음과 삶의 의미에 대한 책을 유난히 많이 읽었는데.. 근데 죽음이 존재하기에 우리 삶이 존귀해지는 거라는 메세지를 많이 읽어서, 이게 주입된 건지 진짜 내 생각인지 분간이 잘 안됨. 인상깊게 느끼고 좋아하는 말이 “내가 삶에 무언가를 기대하지 말고, 삶이 내게 기대하는 게 있다는 걸 기억하라”. 삶이 내게 기대하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살면, 더 의미있게 살 수 있다는 뜻. 우리 삶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우리 삶이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내가 그 의미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 그런걸 생각하면 확실히 죽음이 삶에 가치를 불어넣어주는 것 같은데, 결국 S의 말처럼 이런 말을 되새기고 그 의미를 깨달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거겠지.
Y: 나 역시 개인마다 다르되, 한 명이 두 입장 모두 느낄 수 있다고 생각.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할 수록 후자에 공감하게 되겠지만, 전자도 분명 이해는 감. 후자가 전자의 부분집합이라고 생각.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집합에 포함되겠지만, 죽음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고 깨달아보면 후자라는 교집합에 있겠지. 우리도 이런 대화를 통해 그 후자에 들어가려는 것.
J: 우리가 너무나 평탄하게 살았고 젊기에 이해하기 어려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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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익사 사고 후 평생을 그 기억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동생을 그린 「자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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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먼로는 인생의 모든 행동과 선택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듯, 중요한 것은 과거의 사연이나 이유보다는 주어진 각각의 현재, 우연과 운명이 겹쳐져 만들어낸 지금의 감정과 삶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 먼로의 이야기는 비밀스러우면서도 그 어떤 이야기보다 강렬하고 인상적인 여운을 남긴다.
[네이버 지식백과] 디어 라이프 (Dear Life) (세계문학전집시리즈)
특히 앨리스 먼로가 ‘피날레’라는 별도의 장으로 묶어놓은 네 단편(「시선」 「밤」 「목소리들」 「디어 라이프」)은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지난날을 회고하는 앨리스 먼로의 심경을 엿볼 수 있어 먼로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더없이 큰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먼로는 이 네 편이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이야기하는 최초이자 마지막, 그리고 가장 내밀한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디어 라이프 (Dear Life) (세계문학전집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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